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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03일에 개봉 한 황동혁 감동의 영화입니다. 추운 겨울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입니다. 2018 추석 23일 tvN에서 오후 10:40에 방송합니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The Fortress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선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지는데,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출연 배우와 배역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병헌 Lee Byung-hun은 최명길역을 맡았습니다. 김윤석김상헌역을 맡았습니다. 박해일인조역을 맡았습니다. 고수서날쇠역을 맡았습니다. 박희순이시백역을 맡았습니다. 송영창김류역을 맡았습니다. 조우진은 정명수역을 맡았습니다. 이다윗칠복역을 맡았습니다. 허성태용골대역을 맡았습니다. 김법래역을 맡았습니다. 조아인나루역을 맡았습니다. 진선규는 초관 이두갑역을 맡았습니다. 유순웅대제학역을 맡았습니다. 박지일부제학역을 맡았습니다. 최종률내관역을 맡았습니다. 문창길은 늙은사공역을 맡았습니다. 김서현병판역을 맡았습니다. 김중기도승지역을 맡았습니다. 윤세웅관량사역을 맡았습니다. 신기준 소현세자역을 맡았습니다. 곽자형덩치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단역을 알아보겠습니다. 박노식 군사,1 유독현 군사2, 이장유 군사3, 장태민 군사4, 강현중 군사5, 성규찬 김류비장, 도용구 도원수, 성도현 근왕병 장수1, 곽민호 근왕병 장수2, 하수호 근왕병 장수3, 한동원 조총수1, 윤병희 조총수2, 송형수 전령무관, 이상홍 청장수, 진모 용골대 부하장수, 염상태 당하관1, 전희련 당하관2, 이원욱 당하관3, 정선철 백성, 송욱경 관원, 한창현 금군장수, 박재한 무관부하1, 한동훈 무관부하2, 홍석연 늙은이1, 장정국 늙은이2, 이소연 노파, 강덕중 깃발 정예병, 김난희 계집종1, 박지원 계집종2, 하영 쇼타, 백동현 청군 철기병, 강두현 절컨, 손정환 망기투, 정기욱 마시타이, 박종범 마이투, 현진호 어허너, 김민준 바야르투, 안치욱 왈다, 이상운 히저오, 이정호 만차, 변준필 바쉬, 박주민 어추, 박진수 울러히, 황지환 악공1, 강민석 악공2, 이용원 악공3, 이민배 악공4, 손현준 러버이입니다.

  최희도 호샨, 정회권 까마귀 병사, 전지학 신하1, 양영일 신하2, 조남호 신하3, 허성우 신하4, 최재원 신하5, 김성하 신하6, 곽영웅 금군1, 설민영 금군2, 황진호 금군3, 김말구 금군4, 박주운 북문전령, 고창희 정예병, 윤해빈 나루친구, 서병철 초관참수무관, 김문찬 암문수문장, 김정훈 수라상 궁녀, 김나인 성첩군사, 권훈 가마니, 무관 윤지명, 깃발 조선군, 김기태 동상병사, 오승율 북채군사, 박선용 북문병사, 김진옥 아이엄마, 김동인 우는백성1, 안현정 우는백성2, 전주호 아이1, 조현서 아이2, 엄지만 말토막 군사1, 김양원 말토막 군사2, 김현주 젖먹이 어미, 이호중 매질병사, 신희철 조선군1, 오승훈 조선군2, 김선호 조선군3, 서양훈 조선군4, 황주섭 조선군5, 조이준 젖먹이, 김교용 기수1, 임헌호 기수2, 최민국 기수3, 김유진 기수4, 김태형 기수5, 권효민 김상헌 서예대역, 황종언 칸 경호견 병사, 김재복 멧돼지 도축입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Namhansanseong Fortress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57호.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칭별칭은 주장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유형은 유적, 시대는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은 산성, 건립시기·연도는 통일신라시대, 규모(면적)은 528,460㎡,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일원, 소유자는 국유, 관리자는 경기도 광주시, 문화재 지정번호는 사적 제57호, 문화재 지정일은 1963년 1월 21일(사적 지정), 2014년 6월 22일(세계문화유산 지정)입니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비신 높이 395㎝. 사적 제101호. 1639년 삼전도(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태종 공덕비이다.

  이칭별칭은 병정노란(丙丁虜亂), 유형은 사건, 시대는 조선, 성격은 전쟁, 발생·시작 일시는 1636년 12월, 종결 일시는 1637년 1월입니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은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자료출처]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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