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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 있었던 싸움입니다. 먼저 사전적인 의미와 같이 보시겠습니다.


귀주 대첩 (龜州大捷)


  고려 현종 10년(1019)에 침입한 거란군을 이듬해 2월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입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서 조금 무지하긴 하지만 몇가지 정리해서 올려 봅니다.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거란의 소배압은 1018년(현종 9)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을 것과 강동 6주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강감찬은 정예 기병 1만 2천 명을 데리고 흥화진에 가서 쇠가죽으로 냇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접근하면 물을 한꺼번에 내려 보내는 전술을 활용하여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 전투를 흥화진 전투라고 한다. 이후 1019년 2월, 거란이 또 침입하자 고려는 귀주에서 도망갈 곳이 없는 거란군을 좁은 계곡으로 유인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했다. 거센 바람이 거란군 쪽을 향해 불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화살을 퍼부었다. 이때 거란의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2천여명 뿐이었다.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부른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자료출처]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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